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결말 === 이집트와 시리아가 쌍으로 졸전을 하고, 이스라엘군의 무지막지한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까지 압박에 나서자 결국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응한다. 이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소련 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정까지 갈 것도 없이 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각각 소련과 미국이 지원을 했다.] 다행히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 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중동불패~~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다. 오죽하면 이때 활약한 [[모세 다얀]] 국방장관과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이 "심심한데 전쟁 한 판 또 할까?", "글쎄. 그건 좋은데 '''오후엔 뭐하고 놀지'''?"라는 농담 따먹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래서 제4차 중동전 초반에는 밀린다-- 이집트군 전사자는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였으며, 1500명의 장교와 40명의 파일럿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5천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요르단군 피해는 700명이었으며 6천 명의 부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시리아는 450명이 전사했으며, 256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전사자는 800명 정도였다. 포로는 장성 21명을 포함한 이집트군 5천 명, 시리아군 365명, 요르단군 550명, 소련 군사고문 2명이었다. 이스라엘군은 15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히지도 못하고 고문, 처형당한 인원이 상당하다는 말은 많지만 일단 포로로 정식으로 잡히고 나면 꽤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포로 협상에서 아랍 쪽은 훨씬 더 많은 포로가 잡혔음에도 비협조적으로 나왔는데, 이스라엘 측이 아랍 각국에서 핍박받는 아랍 유대인들의 송환과 시리아에서 처형된 엘리 코헨의 유해 송환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포로 대다수는 가난한 농민들 출신이었고, 반면 이스라엘 포로들은 고급 인력이며 장교인 파일럿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이스라엘 측에 '농노 새끼들'과 파일럿을 교환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고 이스라엘 측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골다 메이어는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이때의 경험이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병기 손실은 이집트군의 경우 전군의 15%에 해당하는 2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잃었다. 이스라엘이 노획한 이집트 무기만 탱크 320대, 대포 420문, SAM 미사일 포대 2기, 차량 1만대에 해당했다. 요르단은 탱크 179대, 장갑차 53대, 대포 1,062문, 차량 3166대, 2만 정의 총기를 잃었다. 시리아는 야포 470문, 탱크 118대, 차량 1,200대를 잃었다. 전투기에 해당하면 이스라엘은 총 469대의 아랍 비행기를 파괴했으며 공중전에서 격추한 숫자가 50대였다. 이집트 공군의 85%가 소멸했다. 이스라엘 공군의 피해는 36대, 파일럿 18명으로 이스라엘 공군 전력의 20% 정도였다. 그리고 추하게도 아랍 전역에서 분풀이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랍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포그롬이 이어졌다. 이집트 유대인 4천 명 중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랍비 수장들을 비롯해서 800명이 투옥되었고, 시리아와 이라크도 랍비들을 투옥하였다. 리비아, 튀니지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이어졌고 수천 명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 추방을 당했다. 이 난장판을 제어한 것은 모로코와 튀니지뿐이었고 나머지 아랍 지도자들은 자국 유대인들을 민중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으로 던져주었으며 유엔과 적십자의 개입조차도 막았다. 이러한 제노사이드 이후 살아남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탈출했으니, 오래 전부터 쪼그라들어 있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더욱 축소되었다.[*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의 유대인 공동체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모로코와 튀니지 유대인 공동체다. 그 숫자는 각각 약 2천 명, 1천 명으로 나머지 아랍 국가들에서는 수명~수십 명만 살거나 모두 이주해서 말 그대로 씨가 말라버렸다. 단 비아랍 국가로 시야를 넓히면 이란이 8,500명으로 가장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